태화를 이끈 리더들
역대 관장
1대 관장에서 16대 관장까지
From the 1st Director to the 15th Director
마이어즈
M. D. Myers, 제 1대 관장, 1920.12~1923.09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질 것"
한국 이름 마의수(瑪義秀). 1906년 내한하여 원산 루씨여학교 교장을 거쳐 1920년 태화 초대관장으로 부임할 때 나이가 55세였습니다.
남감리회의 서울지역 여선교회 사업을 관장하였던 마이어즈는 태화여자관의 설립을 주도하고 태화 사회사업의 기초를 닦은 분입니다.
태화여자관 개관 이후 재임기간(1920.12~1922.9)동안 각종 교육과 문화 혜택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사회사업의 기초를 마련한 마이어즈는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강력한 의지력, 열정적이고 원대한 포부를 지닌 인물로 끊임없이 새 일에 도전하는 개척자였습니다.
태화여자관은 개관 1년도 채 못 된 상태에서 여자성경학원, 재봉과, 야학, 여학교 등 4개 교육과정을 운영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업확장은 선교사들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보다는 배움에 굶주린 한국 여성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한국 여성들은 태화여자관의 탄생을 간절하게 기다렸고, 태화여자관이 문을 열자 거침없이 찾아와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장래의 ‘사회사업가’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목격했기에 마이어즈는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에드워즈
L. Edwards, 제 2대 관장, 1923.09~1929.07
"복음은 생명을 주고, 치료하고, 구원하는 일로 전달되어야"
한국 이름 애도시(愛道是). 1909년 내한하여 배화여학교 교장을 거쳐 1923년 태화의 2대 관장으로 부임할 때 나이가 37세였습니다.
1923년 9월에 2대 관장으로 부임한 선교사 에드워즈는 미국 텍사스주 출신으로 스카릿성경학원을 졸업한 후 1909년 한국에 내한하여 서울, 송도(개성), 춘천, 원산 등지에서 활약했던 경험있는 선교사였습니다.
경험이 풍부했던 에드워즈는 미감리회, 북장로회와 연합경영체제를 구축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열 명이 넘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직원들과 보강된 인원으로 체계있는 사업과 조직을 추진하는 일, 선교사 사택 증축 및 태화여자관 시설을 확충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무리 없이 처리해 나갈 수 있기에는 조화를 중시하는 그의 조정 능력이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태화여자관 사업을 세 가지 이념에서 추진하였는데, 부녀자와 어린이들(Women and Children)의 상한 마음과 정신과 몸(the sick hears, minds and bodies)에 생명을 주고, 치료하고(healing), 구원하는(life-giving, healing and saving)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업이념을 갖고 공중위생 및 아동보건부 크게 3개 부서로 인원과 사업을 편성하여 태화여자관 사업들이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와그너
E. Wagner, 제 3대 관장, 1929.07~1933.11
"노인과 젊은이,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우지 못한 자와 지식 있는 자,
누가 와도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국 이름 왕래(王來). 1904년 내한하여 호수돈여학교를 설립했으며, 1925년에 원산 루씨여학교 교장을 지낸 와그너는 노련하고 경험 많은 선교사로 1926년 가을부터 태화여자관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고 1929년 태화의 3대 관장으로 부임할 때 나이는 48세였습니다.
여성적인 섬세함이 풍부한 인물로 여러 편의 시와 소설을 썼던 그는 한국 선교 및 풍속관계 저술도를 내는 등 한국 고유 문화에 대한 일가견이 있었고 태화유치원 자리가 3•1운동 성역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곳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옛 순화궁 정원에 있던 ‘별유천지’같던 연못(잠저못)을 흙으로 메워 운동장으로 만든 것을 못내 아쉬워했던 낭만적인(romantic)관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다양한 사업들을 지속하면서, 오히려 더욱 늘어난 한국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사업공간을 확장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느끼며, 가사부(Home Economics Department), 사회사업부(Social Service Department), 아동보건 및 공중위생부(Child Welfare and Public Health Department), 교육부(Educational Department)를 두고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이처럼 와그너는 확장된 사업을 계승하여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태화여자관의 성장 제 2기를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한 계승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빌링슬리
M. Billingsley, 제 4대 관장, 1933.11~1940.11
"그러나 저는 해볼랍니다"
한국 이름 필련사(畢蓮史). 1927년 내한하여 태화 가사과 교사를 거쳐 1933년 태화의 4대 관장으로 부임할 때의 나이는 30세였습니다.
그의 부임은 태화의 개혁(reformation) 시대를 예고했습니다. 빌링슬리의 개혁의지는 태화여자관의 명칭이 바뀌는 것에서도 드러나는데, 영문으로 ‘Seoul Social Evangelistic Center'라 표기되던 것이 빌링슬리 취임 때부터 'Taiwha Community Center'로 바뀌고 한글 명칭도 ‘태화여자관’에서 ‘태화사회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재임기간 동안 선교사 조직에 많은 변동이 있었는데 그 자리를 한국인 직원들이 각기 전공분야를 살려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즉, 초기에 선교사들이 주도하고 한국인들이 보조하는 형태였다면, 1935년 이후에는 한국인 사역자들이 전면에 나서고 선교사들이 뒷받침을 해주는 형태로 바뀐 것입니다.
사회사업에 강조점을 둔 빌링슬리는 빈민층, 불우한 환경에 관심을 두고 근로여성들을 위한 구락부사업과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무산아동(無産兒童)교육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구락부 사업을 강화하여 1년에 4~5,000명이 태화사회관을 찾았습니다.
무엇보다 빌링슬리의 가장 큰 업적은 폭넓은 사회사업들을 수용할 수 있는 새 건물을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화 개관 초기부터 제기되었던 400년이 넘은 건물의 신축이라는 과제를 넘겨 받아 큰 공사가 몇 차례 중단되는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2년에 걸쳐 마침내 750평 규모의 ‘동•서양의 건축미가 어우러진’ 아름답고 웅장한 2층짜리 새 건물을 완성하였습니다.
올리버
B. Oliver, 제 5대 관장, 1947.06~1950.
"사회적이고 실용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지닌 사업"
한국 이름 오리부(吳利富). 1912년 내한해서 루씨여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일제 말기에 추방당했다가 1947년 태화의 5대 관장으로 부임할 때 나이는 59세였습니다.
한국 사정에 밝은 노력한 선교사로 ‘농촌 사업’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일제 말기에 태화사회관을 차고 들어앉은 종로경찰서가 건물을 내주지 않아 반환 교섭에 3년 세월이 흘렀고 가까스로 건물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파괴되고 변형된 태화사회관 건물과 집기들을 본래대로 복구시켜 중단되었던 태화 사업을 재개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올리버가 태화사회관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옛 직원들이 옛 직장을 찾아왔고, 경찰서 출입을 꺼리던 일반인들도 태화사회관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올리버는 관장으로 부임한 지 1년 만에 조직 복원을 완료시켰고 빌링슬리가 새 건물을 마련한 직후 포부를 가졌던 다양한 사업들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올리버는 영어반, 친교와 대화로 진행되는 오락부(Recreation Club) 사업, 아동보건 및 공중위생사업, 각종 구락부 사업 등을 재개하였습니다. 한편, 해방 직후 사회상황이 요구하는 새로운 사업들도 착수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구제사업(Relief Work)으로, 특히 월남한 피난민들과 형무소에서 실시한 사업은 단순한 사회사업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 올리버 관장은 태화를 떠나게 되며 태화사회관은 민족과 함께 또 다른 수난의 역경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빌링스
P. Billings, 제 6대 관장, 1954.09~1963.06
"사회관은 교회의 '긴 팔'이 되어
교회가 미치지 못하는 사회영역까지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다"
한국 이름 변영숙(邊英淑). 미시시피 출신으로 역대 태화사회관 관장들처럼 스카릿대학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은 후 1952년 1월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습니다.
미국 선교본부의 빌링슬리 총무(4대 관장)는 6•25전쟁 후 태화사회관 복구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젊고 유능한 인재로 빌링스에게 태화사회관 업무를 부탁했습니다. 빌링스는 휴전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1953년 3월에야 내한할 수 있었고, 20개월 뒤인 1954년 9월 말에야 태화사회관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태화 관장으로 부임할 때의 나이가 25세로 태화사회관의 '청년 관장 시대'를 열었습니다.
빌링스가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일 먼저 조직에 착수한 것은 고문회(Advisory Group)였습니다. 후에 '운영이사회'로 발전하여 태화사회관의 사업을 실질적으로 관장하게 됩니다.
빌링스는 태화의 간판사업인 웨슬레 구락부 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결과, 1960년부터 65년 어간에 실시된 구락부는 6개 부에 모두 91개 반이 조직됩니다.
1961년부터 가정상담(Family Case Work)을 시작하였고, 태화의 또 다른 간판사업이었던 태화유치원과 진찰소 및 아동보건사업도 많은 변화를 거쳐 재개하게 됩니다. 새롭게 시작한 도서실과 캠프 사업은 태화사회관이 학생, 청년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젊은 기관이 될 수 있게 하였고, 설립당시부터 추구해 온 '사회교육'의 이념에 충실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인의 '자립의지'를 높이 평가하던 그는 태화사회관 관장직을 사임할 때, 더 이상 선교사 관장이 아닌 한국인 관장이 사업을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하여 1963년 한국인 관장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